이번에 좋은 기회가 생겨 재작년 봄~여름에 했던 Virgo versus the Zodiac의 번역을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14만 단어를 4일 안에 읽게 됐는데... 다른 사람들의 작업 속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많이 빠듯했네요😢
첫 번역이라 저에게는 정말로 의미가 깊었고, 정말로 좋아하는 게임이기도 해 번역 품질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스스로 아쉬운 부분이 조금 있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번에 재검수를 하며 어느 부분을 수정했는지 얘기하려 합니다.
1) 맞춤법 및 일부 문장 수정
하나하나는 사소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전체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당시에는 몰랐지만 다시 보니 맞춤법 실수가 상당히 많더라고요; 심지어는 되/돼 실수도 하나 있었는데, 발견했을 때는 진짜 육성으로 소리질렀습니다 (...)
아무튼 눈에 바로 보이는 실수들은 전부 바로잡았고, 이전과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다 생각합니다! 물론 오류가 하나도 없을 거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요😅
또 몇몇 문장 역시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수정을 좀 거쳤습니다. 이 경우는 엄밀히 따지면 틀린 번역은 아니고 개선의 여지가 많은 번역이었다 할 수 있겠네요. 사실 꼼꼼히 살펴보면 개선할 수 있는 문장이 많았을 텐데, 앞에서 얘기한 대로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수정을 많이는 못했습니다. 조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에요.
2) Ruler의 번역
기존에는 일본어 번역을 빌려 써 절대자라 번역했었는데, 설정 상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생각해 지배자로 개정했습니다.
우선 절대자라는 단어가 가진 완전한 존재라는 뜻이 Ruler와 맞지 않았습니다. Ruler들이 이전에 우주와 조디악을 통치하긴 했지만, 조디악이 들고 일어난 이후로는 실권을 잃고 도망다니는 신세니까요.
또, 게임의 모티브가 된 점성술에서 12궁을 각각 관장하는 행성들을 룰러 또는 지배성이라 부르는 것만 봐도 Ruler는 절대자보다 지배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게 느껴졌습니다.
3) 버고의 성계명인 Holy asylum의 번역
이건 정말로 할 얘기가 많은데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거룩한 요양원 > 성스러운 병동으로 번역을 개정했습니다.
사실 이 번역은 예전에 한 번 피드백을 받았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설정 상 버고의 상태를 감안했을 때 Asylum의 번역이 정신병원이 되어야 하며, 요양원은 한국에서 노인을 보호하는 시설의 느낌이 강해 원문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죠.
당시 제가 Asylum을 요양원으로 번역했던 이유는 일본어판에서 Asylum이 요양소로 번역되었던 것도 있거니와 단어 자체에 중의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원문 영단어는 피난처와 정신병원 두 가지 뜻을 가지는데요, 저는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 단어가 두 의미 모두를 지니고 있다 느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직접 성계를 방문하게 되는 챕터 6 전후를 기점으로 단어의 뉘앙스가 바뀌죠. 방문 전까지는 회복이 목적인 보호소인가보다 했다면, 방문 후에는 강제로 환자들을 가두어 놓는 수용소인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이니까요. 그래서 전 두 이미지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요양원이란 단어를 쓰면 전체적인 느낌은 후자에 가깝지만, '요양'이란 요소에서 전자의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그러나 그 두 느낌의 차이를 드러내기엔 단어가 주는 노인 시설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력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번역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수긍했던 것도 그래서였고요.
그렇지만 피드백에서 언급됐던 정신병원이 적절한가 하면, 사실 개인적으로는 좀 꺼림직합니다. 정신과 수련까지 고민해 봤던 입장에서 당연히 정신과를 나쁘게 생각하진 않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 아직까지는 단어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지 않나 싶거든요. 그래서 조금 중립적인 이미지면서 챕터 6을 진행한 다음에도 어울릴 만한 단어로 병동을 가져왔습니다. 앞의 붙는 Holy의 경우 버고의 칭호인 Holy queen / 성스러운 여왕 과 통일성을 주기 위해 성스러운을 그대로 가져왔고요.
4) 일부 조디악의 칭호
- 리브라, 파이시즈, 사지타리우스
게임을 해 봤다면 아시겠지만 조디악에게는 제각기 칭호가 있는데요, 이번에 이 셋의 칭호를 개정했습니다.
우선 리브라입니다. 기존에는 호칭인 the just를 정의로운 자라 번역했었는데, 명백한 오역이었습니다. 왜 이걸 그딴 식으로 번역해 놨는지 의아하시겠지만, 사실 저 스스로도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참 부끄럽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에 와서라도 고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은 파이시즈입니다.
기존에는 Redeemer의 번역으로 구세주와 구원자를 혼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구원자로 전부 통일했습니다. 물론 기존 번역 역시 아예 기준이 없는 혼용은 아니었습니다. 바이러스들이 파이시즈를 부를 때는 구세주로, 나머지 경우는 전부 구원자로 번역했었거든요. 다만 그렇게 차이를 준다 해도 크게 편익이 없을 것 같았고 오히려 플레이어를 헷갈리게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칭호를 통일하기로 결정했고, 구세주와 구원자 중 수직적인 느낌이 드는 구세주보다는 수평적인 느낌의 구원자를 선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변동이 있었던 조디악은 사지타리우스입니다.
원문에서 사지타리우스의 칭호는 philosopher인데요, 기존에는 이를 현자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했던 절대자 / 지배자 번역과 마찬가지로 현자는 능력 밖의 칭호라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철학자라는 번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이미 얻은 사람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에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이 외에도 현자를 대체할 표현으로 사색가 역시 고민해 봤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지만 결국 철학자로 결정하게 됐습니다. philosopher의 대응어로는 철학자가 훨씬 일반적인 것 같았거든요.
- 캔서, 아쿠아리우스
이 둘은 원문과 핀트가 어긋나서 고쳐야 하나 고민했는데, 또 마냥 틀린 건 아니라 결국 그대로 둔 케이스입니다.
캔서같은 경우 원래 칭호는 Beholder인데, 기존에는 감시자로 번역했습니다.
Beholder가 감시자로 번역된 사례는 여럿 있고, 틀린 번역 역시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살짝 뉘앙스가 다르지 않나 싶었습니다. Beholder는 어떤 의미도 없이 바라보기만 한다는 느낌이 강한데 반해 감시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켜본다는 의미가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캔서가 스토리 중에 감시를 하지 않느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단 직책부터가 간수잖아요. 그래서 결국 캔서의 칭호는 그대로 두게 되었습니다.
아쿠아리우스의 칭호인 해방자는 정말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원문인 Untied는 본인 자체가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이 100%거든요. 그런데 일본어판에서는 이 칭호가 누구를 해방시키는 사람이라는 뜻의 해방자로 번역되었고, 당시 전 이 번역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아쿠아리우스에게는 오히려 해방자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게임 상에서는 구속되지 않으려는 태도보다는 염소나 외계인처럼 억압받는 계층을 해방시키려 하는 모습이 더 눈에 띄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원문과는 큰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고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단 큼직큼직한 건 이정도네요. 이거 말고도 단어 한둘이랑 적 하나 정도 개정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까지 쓰면 너무 글 쓰는 게 미뤄질 것 같아 우선은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조디악 진짜로 너무 애정하는 작품이에요. 이미 하셨다면 정말로 감사하고, 아직 안 해 보셨다면 나중에라도 꼭 플레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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